진보정치에 독배를 들게 한 이정희와 당권파 / 김민웅, 프레시안 by 허남설

낡은 진보의 무덤 VS 새로운 진보의 모태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 우리는 진보정당의 역사적 대전환의 현장을 목격했다. 어제의 진보정치와 내일의 진보정치는 2012년 5월 12일로 확연히 갈라진다. 역사는 이 날을 "낡은 진보의 무덤과 새로운 진보의 모태"로 기록할 것이다.

더 이상 참담할 게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우리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은 진보정치의 패배주의가 아니라, 진보정치의 좌표 재설정이다. 우리는 진보정치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고 생각할 작정이다.

통합 진보당이 전 국민 앞에서 조롱당하고 있고, 보수 언론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맹폭을 가하고 있다. 다 자업자득이다. 물론 이러한 사태의 원인과 책임규명은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다.

잃은 것은 정당성, 얻은 것은 쪽박

그러나 여기서 확실한 것은 중앙위원회 폭력 충돌사태와 같은 상황이 뻔히 예견되는데도 무책임하게 사안해결의 방도를 악화시켜온 이정희 전 공동대표와 당권파에게 있다. 통합진보당의 일부세력은 진보정치 전체의 운명에 독이 묻은 비수를 꼽고 말았다. 결과에 대한 예측능력과 책임이 없는 정치는 누가 뭐래도 악덕이다.

우리는 진보통합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더군다나 진보정치가 보다 절실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민중들의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절망을 깊게 한 죄는 누가 질 것인가? 문정현 신부님이, "썩어빠진 진보정당은 없는 게 도리어 낫다"고 하신 말씀은 이 시대의 진보적 양심을 가진 이들 모두의 목소리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면서 당권파가 얻은 것이 도대체 무언가? 잃은 것은 정당성과 주도권이요, 얻은 것은 쪽박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구걸도 하지 못한다.

무한책임을 외면한 당권파의 독선

진상조사위원회의 결론에 대해 관련당사자들이 소명할 기회는 당연히 주어져야 하며, 오류가 있다면 교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은 백번 옳다. 잘못된 사실에 기초한 여론몰이는 정당하지 못하다. 따라서 그 기초를 먼저 바로 잡고 사태의 수순을 정하자는 논리는 잘못되지 않았다. 당권파의 항변과 논리는 이러한 점에서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 첫째, 진상조사위는 조사결과에 대한 승복 시스템을 충분히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작업을 벌였다. 책임져야 할 바다. 둘째, 조사 결과에 대한 항변은 정당하지만, 당의 파행을 막을 수 있는 수준과 한계를 설정하지 않은 채 대단히 거친 방식으로 사안에 접근한 당권파의 어리석음이다. 이 가운데 더 큰 책임을 묻자면, 단연코 후자다.

왜인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진상조사위인데 무슨 말이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놓고 해결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당권파에게 그 주도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주도권을 스스로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말았다. 의도적 부정이 아니더라도 부실이 있었음은 누구나 인정했고, 또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어도 일부 부정이 있긴 했다고 당권파도 수긍했다.

그렇다면 이건 거듭 강조하지만 국민적 시선에서 부정으로 판단되고, 무한 책임을 져야할 사태였다. 그러니 먼저 깨끗하게 사과하고 경선과정에서 후보로 당선된 이들의 일괄사퇴로 국면을 전환하고 차분하게 사태를 관리, 정비하는 수순을 밟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항변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누가 그걸 하지 말자고 했는가? 게다가 국민들의 시선이 호도되고 있다고 하면서 국민들의 눈높이를 경멸했다. 독선의 지존이다.

유아적 자폭정치의 원인은?

진상조사위의 결론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그걸 해결할 기구를 만들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구 설치가 당 전체의 파열을 가져오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억울한 당원의 명예회복과 오류를 바로 잡는 일은 그걸 할 수 있는 당의 존립이 전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당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이들이 스스로 그 명예를 쓰레기통에 곤두박칠 치듯 버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명예회복의 기회를 자진해서 폐기하고, 자신들만의 논리로 고립을 자초했다. 대중정당의 일원으로서 국면전환을 위한 정치력이 전혀 없고, 대단히 "유아적 상태의 자폭정치(自爆政治)"를 벌이고 말았다.

이게 다 뭣 때문인가? 진보정치의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 결과다. 그래서 그걸 자신의 것으로만 독점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진상조사위의 결론에 대한 억울한 심정도 자리 잡고 있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일 진보정치의 운명과 미래를 먼저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결코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혹여 개별적으로 억울하고 항변할 것이 많다 해도 먼저 구할 것은 진보정치의 국민적 위상이다. 이를 깨닫고 그대로 실천했다면 사태는 다른 경로를 밟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진보정치의 주인은 자신만이라고 여긴 독점에 대한 욕망이 오늘의 비극을 낳고 말았다.

진보정치의 주역은 역사의 대의를 함께 하는 이들인데 그걸 못한다면 자격상실이다. 중앙위에서 이들은 중앙위원과 의장의 자격을 문제 삼은 모양인데, 그런 문제를 삼을 자격조차 이미 잃어버린 것을 모르는가?

이석기, 김재연 즉각 사퇴하라

자, 결론을 내려 보자. 통합진보당의 상태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이들은 정당정치를 할 능력과 자격을 스스로 상실했다. 누가 빼앗은 것도 아니며, 누가 버리라고 한 것도 아니다. 이제 이들은 통합진보당의 중심에 설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이들의 힘에 기초한 후보와 당선자, 그리고 당직자는 모두 물러나야 한다.

특히 국회 개원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석기, 김재연은 이 모든 사태의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하도록 해야 한다. 진보정치의 분란이 일으킨 소용돌이가 찻잔의 태풍이 아니라, 진짜 태풍이 되게 한 핵심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 이젠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국민적 지지의 기반을 잃은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은 존재가치와 이유가 없다.

이들은 이후 진상조사위 재조사 결과 명예회복이 된다고 해도, 이번 사태의 정치적 해결에 무능함과 파행을 자초한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권파, 진보적 역사진행에 장애물

프랑스는 좌파정권을 정부로 선택했다. 라틴 아메리카는 이미 진보정치의 성숙을 향해 가고 있다. 이 나라 역시 그런 역사적 진로를 선택하기 위해 무수한 이들이 희생해왔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걸 자신의 독점적인 정치적 자산인 줄로 알고 통합진보당의 현실을 이렇게 망가뜨린 이들은 이런 역사적 경로의 장애물이 되었을 뿐이다.

헤겔의 논법대로 하자면, 이들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자기도 모르게 껍데기가 되어버린 셈이다. 껍데기는, 신동엽의 일갈대로 "가라!". 그건 우리에게 필요없다.

동지인줄로 알았는데, 적이 된 자들이 있다. 자신들이 스스로 택한 길이다. 정치적 인격의 파탄이며, 역사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다.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인가?

성서에는 하늘나라는 이와 같다면서, 이런 말씀이 있다. 어느 현자가 창고에서 쓸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는 일을 한다. 그건 평소에는 잘 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느 것이 쓸모가 있는지,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지. 그런데 우린 그걸 이번에 너무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성서 이야기 또 하나.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여자들에게 왕은 칼을 가져와 반으로 갈라 나누라고 한다. 그러자 한 여자가 기겁을 하면서, 자신은 양보할 테니 저 여자에게 주라고 한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성서의 이야기와는 달리, 현실에서 다른 여자는 "그래, 그 칼을 내게 달라." 그러고는 누구도 말릴 사이 없이 아이를 반으로 쫙 갈라 피투성이의 죽은 시신을 챙겨 자기 것이라고 기고만장해 한다.

새로운 시작

끝은 시작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이번 사태는 그 자체로 답을 내놓았다. 청산해야 할 "용팔이 진보"가 있는가 하면, 견고하게 지지하고 세워야 할 "미래형 진보"가 있다. 진보의 길은 어렵다. 그러나 그 길을 포기하면, 이 나라의 고난 받는 백성들의 통곡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진보의 허망한 껍데기가 드러난 날, 우리는 그 진보의 진정한 씨알을 채우는 훈련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나 도리어, 다행이다.

인간 꼴부터 되지 않은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김민웅 / 성공회대 교수

출처_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513191740&section=01

통합진보당 부정경선에 대한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된 이후부터 줄곧 가장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논평해온 사람은 위 글의 필자인 김민웅 교수라고 생각한다. 조준호 공동대표가 주도한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대한 소위 '당권파'의 불만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동시에 진보정치의 명운을 걸고 정치적 결단을 촉구하며 그 당권파들을 위로하는, 매우 부드러운 논리를 폈던 그다. (사실 일방적으로 당권파를 비난하는 진중권 등의 논평은 다소 감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당원들이 공당의 대표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고, 이를 사실상 방조함으로써 폭력사태에 책임져야 할 이들은 아예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비상식적인 당권파 인사들의 태도에 김민웅 교수도 분노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과 진보주의의 지지자들이 느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임계점에 달했다. 통합진보당은 불행히도 다시 분열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더 이상 현재 당권파라 불리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대놓고 무시하는 스탈린주의자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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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살려 만신창이 서민 경제 구출해야 / 도준환, 프레시안 by 허남설

지금 세계는 1%대 99%라는 말로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현상을 표현해주고 있다. 한국은 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 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살릴 기업과 죽일 기업을 구별하여 살릴 기업에는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살리고 죽일 기업은 퇴출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반면에 살아남은 기업들에게는 국내시장을 독과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호기가 열렸다. 1995년에 300인 이상 고용한 대기업의 수가 2만 개가 넘었으나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에는 1만9000개가량으로 줄었고 2009년에는 2916개로 급감했다. 10년 사이에 1/6로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외환위기 이전의 260만 개에서 1999년 274만 개, 2009년 307만 개로 늘었다. 수적 구성비로 보면 대기업은 0.1%, 중소기업은 99.9%에 이른다(중소기업중앙회의 <중소기업현황>). 철저한 대기업 체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중소기업을 하기 좋은 환경이라 그 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창업한 결과이다.

미국은 고용인 500인 이상 대기업 수는 100만개가 넘는다. 수적 구성비는 15%에 이른다. 일본의 대기업 수는 5만 개, 수적 구성비는 1% 정도이다.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대기업과 하청 또는 납품 관계에 있기 때문에 0.1%의 대기업이 99.9%의 중소기업을 지배하는 힘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강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의 60%가 수출 대기업의 하청업체이고 대기업 하나에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 4-5개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일방적인 요구에 끌려다니는 일방적인 수탈관계를 피할 수 없다.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부(정보통신부문)의 영업이익률은 2007년에 10.3%, 2008년 8.9%, 2009년 8.7%이다. 반면 2차 협력업체 20개사의 평균 이익률은 2007년 0.9%, 2008년 2.2%, 2009년 1.9%에 머물렀다.

현대차의 계열사인 11개 부품사의 영업이익률은 1999년 7.7%에서 2009년 상반기 9.3%로 높아졌으나 비계열 1차 부품업체는 같은 기간 4.6%에서 2%로 떨어졌다. 대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내는 사이 납품업체들은 죽어가고 있다. (산업연구원 자료)

그러니 중소기업들은 동물원 우리에 갇혀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정도로 대기업이 던져주는 먹이에 의존하여 목숨을 이어가는 동물의 모습에 비유된다. '삼성 동물원'이라는 말이 그렇게 해서 생겨난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는 중소기업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발전할 수 있는 생태계가 이미 거의 파괴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을 거쳐 대기업으로 성장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반면에 소수의 대기업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천국과 같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소수의 대기업들이 독과점적으로 지배하는 산업이 너무 많다. 독과점 구조가 고착된 산업(1사의 시장 점유율이 50% 이상, 3사의 합계가 75% 이상인 부문)이 46개로 이들 산업의 상위 3사가 차지하는 시장점유율은 평균 92.9%로 광업, 제조업 평균의 두 배 이상이다.

몇 부문의 예를 들면 승용차 90.5%, 라면 83.6%, 정유 81.8%, 맥주는 100%이다. 이렇게 시장 점유율이 높아 경쟁할 필요가 없으니 R&D 비율도 낮고 해외 개방도도 낮으며 내수 집중도는 상당히 높다.(공정거래위원회 자료 : 2010년 12월)

그러니 최근 정유, 라면 등에서 드러났듯 담합에 의한 독과점 가격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완전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수출가격보다 국내에서의 판매가격이 비싸기 마련이다.

작년에 대형마트들에서 판매한 저가 TV의 가격을 놓고 그동안 삼성전자나 LG전자가 국내시장에서 폭리를 취했다는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가 최근 수년간 높은 물가상승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미국은 국내시장을 독과점적으로 지배하는 기업, 특히 제조업체는 없다. 20세기 초 반트러스트법(반독점법)들에 의해 미국 국내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던 록펠러 석유회사 등이 해체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독과점 기업들이 해체와 분할을 당했다.

최근에도 마이크로소프트사나 구글사가 독과점규제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았다. 위반 판정이 나면 기업이 존속할 수 어려울 정도의 무거운 징벌적 배상이 부과된다.

물론 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 기업의 규모와 시장지배력을 키우는 일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미국 연방정부나 사법부가 이렇게 하는 것은 독과점적 시장 지배체제로 인해 공공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더 큰 사회적 피해로 보고 이를 용납하지 않은 결과이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대기업들의 규모의 경쟁력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왔으며 독과점에 대해서도 늘 관대한 태도를 취해왔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에는 외환보유고를 늘리기 위해 더욱 수출 대기업에 의존하고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서민 경제를 외치던 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2006년에 그때까지 유지되던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를 아예 폐기했다. 또 한미 FTA를 체결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대기업의 수출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농축산부문이나 서비스시장을 활짝 열었을 뿐 아니라 투자자-국가제소제(ISD) 같은 위험한 제도까지 받아들였으니 한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셈이다.

이명박 정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각종 대기업 규제 법령을 철폐하고 보조금을 지불했다. 재벌들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없앴다. 금산분리제도도 완화했다. 게다가 투자세액공제제도 등을 통해 법인세 감면 혜택을 베풀고 있다.

이렇게 대기업 우선 정책을 취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명박 대통령 임기 3년간 10대 재벌의 계열사는 무려 50%나 늘어났으며 2010년 4대 재벌의 매출액은 GDP의 50%를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대기업들은 계속 사상 최대의 이익을 갱신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들다. 2009년 통계를 보면 상위 1%에 드는 기업이 전체 영업이익의 50.6%를, 1~5%에 해당하는 기업이 32.4%를 창출하고 있고 하위 30%는 -9%를 보여주고 있다.

또, 2010년 4월의 통계에 의하면 중소기업 가운데 영업 손실 기업은 35%이고 은행이자를 다 갚지 못하는 기업들까지 합하면 40%이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이 한계적 상황에서 생존에 급급함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이렇게 차별적인 상황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대기업이 협력업체이거나 하청업체인 중소기업들에 대해 누리는 전능한 힘 때문이다. 납품단가를 최대한 깎도록 요구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적정한 이윤을 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회계장부의 공개까지도 요구한다고 한다.

이래저래 해마다 엄청난 이익을 올린 대기업들은 벌어들인 돈을 금고에 쌓아두고 투자하지 않는다. 그 액수가 무려 300조 원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현금자산 보유비율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높고 그 증가속도도 엄청나게 빠르다.

그럼에도 이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 이유는 현행법으로 국내에 더 이상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투자라고는 내부거래를 하기 위해 부품업체를 설립하거나 자영업자들의 사업영역에 뛰어들어 시장을 빼앗는 일이다. 낙수효과가 아니라 흡수현상만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원성이 점점 커지자 정부는 동반성장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위원회가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선정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초대 위원장에 정운찬 전 총리를 임명했다. 정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중소기업과 나누는 제도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러자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초과이익공유제라는 것은 자본주의 교과서에서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제도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정운찬 씨는 대통령이건, 정부건, 재벌이건 어디에서도 협조를 해주지 않자 1년여 만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동반성장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움직여지는 과정은 이명박 정권 산업정책의 본질이 무엇인 가를 매우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것은 철저한 대기업 우선 정책으로 중소기업은 안중에조차 없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가 동반성장위원회를 만든 이유가 진정으로 동반성장을 바란 것이 아니라 그런 척 흉내만 내려 했기 때문이다. 동반성장위원회를 법적으로 아무 강제력도 없는 민간기구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주도하는 중소기업 적합업종의 선정이나 실천도 결국 민간의 합의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으로서는 사실상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다. 만약 진정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면 이런 엉터리 위원회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대기업들이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국제경쟁을 위해서는 기업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야 했고 상품이나 기술, 노동생산성 등의 경쟁력도 커져야 했다. 한국이 주로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이므로 그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동안 국민들은 대기업체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부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사회와 시장에 대한 대기업들의 지배력이 너무 강해져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과감하고 근본적인 혁신과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고용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의 약화나 붕괴는 국내 소비수요의 지속적 감소를 통해 경제 전체를 허물어뜨릴 가능성이 있고 그에 따라 국민들 사이의 양극화도 계속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제멋대로 과욕을 부려온 대기업들이 반성하는 기미는 전혀 없다. 작년 12월에 유통산업발전법을 개정하여 대형마트에 대한 강제휴일제와 함께 영업시간 제한을 일부 지역에서 시작하자 대형마트들은 지난 3월에 당장 유통산업발전법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냈다.

잘못된 행위를 하면서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법에 의존해 버티려는 것이다. 그런 행동이 대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더 부채질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정부가 나서서 강력하게 규제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대기업들을 어떻게 규제해야 할까?

먼저, 정부가 나서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힘의 불균형을 완화하고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대기업 숫자를 최소한 일본 수준의 절반 수준으로라도 늘려 독과점 질서를 무너뜨려야 한다. 극소수의 대기업만이 군림하는 한 중소기업은 결코 그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째로, 새로운 사업 분야에 대한 대기업들의 국내투자는 정부가 철저히 모니터링하여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 또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의 고유 분야를 폭넓게 재지정하여 대기업들이 뛰어들지 못하게 하고 기왕에 진출한 기업도 철수를 유도해야 한다.

셋째로, 대기업이 납품이나 하청관계의 중소기업에 대해 단가나 대금의 부당한 인하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제도화해야 한다. 또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인력과 기술을 빼내어 수직계열기업을 만들거나 총수일가와 특수 관계에 있는 기업에게 일감을 몰아주는 행동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

넷째로, 공정거래위원회의 감시, 감독활동을 강화하고 위반 시에는 몇 배로 보상하는 징벌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 특히 공정거래위원회의 직원들이 대기업과 유착하지 못하도록 감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퇴직 후 유관기업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다섯째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이 성과위주만을 우선하는 기업의 경영과 인사정책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주주자본주의와도 직접 관련되므로 주주자본주의의 여러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돌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것은 대기업과 관련한 제도의 개혁으로 쉽게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대부분 재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재벌문제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는 이 문제를 논의해보자.



도준환 / 전 부평 주영백화점 대표

출처_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20419182620&section=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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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by 허남설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 폭력으로 유지되는 국가와 결별하기」, 박노자 저, 한겨레출판, 2012


얼마 전 다가올 4.11 총선에서 어느 정당의 비례대표로 선출됨이 알려지면서 일시적 유명세를 치른 대표적 진보주의 지식인 박노자의 신간이다.

최근 들어 박노자의 정치적 입장은 그가 비례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정당의 지지율만큼이나 군소적인 경향으로 흘러가는 듯 하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일간지 칼럼연재 등으로 상당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그이지만, 정작 그의 정치는 점점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그에게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념적·사상적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이전부터 꾸준히 피력해오던 그의 정치관의 한 축이 현 한국사회의 정치와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 와 닿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박노자의 신간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그의 정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화해 불가능한 그 지점을 명확히 드러내는 책이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해, 국가를 부정한다. 정확히 말하면, 태생이 폭력적이며 또 폭력으로써 유지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국가를 부정한다. 주로 국가적 단위에서 행해지는 전쟁 규모의 폭력에 초점을 맞춘다.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 뿐만 아니라, 전쟁에 동조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그들ㅡ종교성직자, 지식인 등ㅡ과 이에 포섭된 평범한 개인들의 기록 역시 서술대상이다. 아무 개인적인 원한도 갖지 않은 상대방을 기계적으로 서로 죽이도록 만드는 전쟁은 '국가'라는 실체 아닌 실체가 생산하는 최악의 비도덕적인 범죄다. 이런 전쟁을 철폐하는데 있어 사회지도층의 선한 양심, 국가 간의 상호평화조약, 그리고 개인적인 평화주의 따위에는 기대하기 어렵다. 저자는 오로지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좌파적 대중운동에 의해서만 그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사실상 결론짓는다.

이와 같이,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에서 저자가 전반적으로 ‘국가’에 대해 취하는 견지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나를 배반한 역사」 등의 이전 저작에서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앞의 책들을 접해본 이들이라면 이미 익숙한 담론이다. 바탕이 되는 소재도 저자가 즐겨(?) 사용하는 단골메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ㅡ폭력적인 경찰, 극악한 사형제, 국가주의 주입기관으로써의 학교, 권력과 타협하는 주류 종교세력, 군사주의가 깃든 기업문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가혹한 탄압 등등.

그렇다면, 박노자가 역설하는 ‘국가주의와 폭력’을 논하는데 있어서는 비교적 일관적인 그의 큰 맥락을 제쳐두고, 오히려 세부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의 논쟁점들을 짚어보며 이 책을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국가’라는 거부하기 쉽지 않은 대상, 그리고 그 국가가 벌이는 거대한 폭력에 대한 논의가 간단한 문맥으로 명쾌하게 정리되기는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 박노자는 전쟁 자체에 내재된 잔인한 폭력성이 바뀔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아프간·이라크 등지에서 미국이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운 ‘정의로운 전쟁’을 비판한다. 다음과 같은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좋은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다. ……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기쁜 일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얻은 전승은 슬픈 일일 뿐, 장례식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p.93) 하지만, 동시에 그는 20세기 피(被)식민지에서 자기해방을 위한 저항의 수단으로써 전쟁을 벌였던 역사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군사적 폭력이라고 해도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 피라미드형의 세계체제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역사적으로 필연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며……” (p.299)

국가 등 집단의 논리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만 바라보자면, 오히려 그 폭력성에 대해 우려하며 알제리 해방전쟁에 반대를 표명해, 생의 말년에 좌파로부터 극도로 심하게 비난 받았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평화주의가 일관적이면서 순수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식민-피식민의 억압적 관계를 두고 보면, 박노자가 저항수단으로써의 폭력을 용인하듯, 카뮈의 견해에도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이는 국가 혹은 이와 비슷한 민족 등의 집단이 수행하는 폭력을 논할 때 당파성의 맥락이 고려될 수 밖에 없음을 뜻한다. (박노자는 식민국가에 앞서 피식민 민족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으며, 카뮈는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으로서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대해야 하는 폭력과 그 원초적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찬성할 수 있는(!) 폭력은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다. 박노자가 제기하는 국가와 폭력에 대한 논의는 간단치만은 않은 정치적 사고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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