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books

작은 집을 권하다, 다카무라 토모야 저, 오근영 역, 책읽는수요일, 2013

24.19㎡. 서른살이 돼 처음 자취를 시작한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넓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의 내 방보다 작다.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이 제거됐다. 책상, 책장, 옷걸이, 오디오 등등. 여기에 살면서부터는 철저한 ‘기능주의자’가 됐다.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한 크기면 충분하고, 식탁과 책상은 따로 마련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물의 제 의미를 찾아준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니, 식탁은 책상이 되기도 하면서 의미가 더 풍부해졌다. <작은 집을 권하다>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일본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스몰하우스’(Small House)에 대해 설명한다. 3평(약 10㎡) 정도의 작은 집에 거주하는 6명을 취재해 쓴 책이다. 물론 저자도 스몰하우스에 산다. 어느 산 깊숙이 버려진 듯한 아주 보잘 것 없는. 삽도로 실린 그의 집을 보면 누구나 ‘일본인들은 역시 참 괴짜군’이란 생각이 들 거다. 미국과 호주에 거주하는 그의 취재 대상들이 사는 집은 좀 다르다. 그것은 얼핏 보기엔 컨베이어 벨트에서 대량 생산한 주택처럼 엇비슷하게 깔끔하다. 주목할 것은 외관이 아니라 그 속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많은 이들이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무리가 없는 작은 집을 갖자”고. 책에 등장하는 사례에는 주택 융자에 치이다가 결국 작은 집을 갖게 됐다는 사람도 있다. 다른 부류도 있다. 도시에서 그럴 듯한 전문직을 갖고 있지만, 본인 나름의 철학으로 인해 일부러 작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증언한다. 작은 집이 마음의 평안을 갖게 했노라고, 저자는 이를 ‘개인정신주의’라 부른다. 이어 스몰하우스 운동의 의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작은 집에 살다보면 결국 환경에도 도움이 되는 효과를 발휘하는 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럴 것 같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이 땅에 그만큼 낭비는 줄어들 것이고, 지구는 좀 덜 아플 거다. 스몰하우스 운동의 의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가 물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그가 내린 답은 스몰하우스 운동의 실행자들보다 가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를 읽었을진대 세상은 ‘크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왜 그러냐고? 모르겠다. 아는 것은 이 책이 제시하는 스몰하우스 운동에 많은 한계와 난관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는 거다.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싱글 혹은 2인 커플이다. 자녀가 있을 경우에 적절한 스몰하우스의 모델은 보이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작은 집이 한적한 시골에 자리잡았다. 스몰하우스의 도시적 모델은 언급되지 않는다. 과연 이 많은 인구가 너른 들판과 산골짜기 곳곳에 스몰하우스를 짓고 사는 것은 친환경적인가. 모두가 전원일기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

저자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한다. “식량을 비축해두기보다는 신선한 재료를 마켓에서 사다 먹는 게 더 좋다. 언제 입을지 모를 옷가지들을 상자에 넣어 쌓아두기보다는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 기분에 가장 잘 맞는 옷을 구입하는 게 낫다”, “식사는 얼마든 밖에서 할 수 있고, 세탁이 필요할 때는 동전 빨래방을 사용하면 된다. 공공도서관은 자기만의 거대한 서가가 된다” 등등. 그 고결한 ‘개인정신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나를 탓해야 하는 걸까.

서현: 빨간 도시 books

빨간 도시, 서현, 효형출판, 2014

10여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천성산 터널 논쟁이 있었다. 터널 공사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터널 만들면 지금 거기에 살고 있는 도롱뇽 다 죽는다”며 “우회도로를 건설하라”고 주장했다. 한 종교인은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도록 단식 투쟁을 했다. 토목업계에서는 “공사 중단으로 인한 연간 손실이 2조”라며 “우회도로 건설은 시간적·경제적 낭비”라고 호소했다. 결국 당시 대통령이 나서 천성산 터널 공사는 원점에서 검토됐다.

환경보호와 경제적 효용이라는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치. 이들의 다툼은 토목 공사를 두고 늘 반복된다. 그런데 누군가 여기에 대고 “산을 돌아가는 우회도로가 산을 뚫고 가는 터널보다 더 친환경적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이때 원점에서 검토될 것은 터널 공사가 아니라, “터널은 반환경적”이라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동의했던 우리의 인식 ‘틀’일 것이다. 서현 교수(한양대학교 건축학과)의 <빨간 도시>는 이런 ‘틀’을 비틀고 부수려는 불온한 목적으로 가득찬 책이다. 그래서 표지가 빨간 모양이다.

저자 스스로 “건축을 통해 본 세상의 목격담”이라 밝힌 이 책은 현재 우리 도시와 건축의 물리적 형태가 나오게 된 틀, 배경 자체에 주목한다. 예컨대 우리가 다닌 초등학교의 모습이 어디든 딱딱하고 획일적인 것은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군사적’ 교육철학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정체 불명 양식의 요란한 예식장 건물은 유럽과 유교적 전통과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넘나드는 우리의 결혼 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병영과 잡종, 이 같은 배경이 각각 오늘날 딱딱한 학교와 요란한 예식장을 계속 찍어낸 틀인 셈이다.

이처럼 저자는 이 도시의 풍경 곳곳에 깔린 배경을 하나씩 밝혀낸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그리스·로마 신전마냥 엄숙한 도서관, 고속국도변 광활한 평야에 우뚝선 러브호텔, 풍경보다 ‘뽕짝’소리를 먼저 감상하게 되는 휴게소, 시민은 다가서기 힘든 국회의사당 등 모든 익숙함 뒤에는 우리의 어떤 고정된 틀이 자리잡고 있다. 이 틀을 건드리지 않는 한 변화나 진보는 없다.

우리 도시와 건축의 물리적 표현은 늘 틀에 대한 고민에 앞서왔다. ‘새롭거나 낡았거나’, ‘크거나 작거나’, 혹은 ‘예쁘거나 못 생겼거나’하고 표현만 따지는 것은 ‘새로 만난 가슴이 크고 얼굴이 예쁜 여자’라는 서술만큼이나 표면적이고, 이에 남성들이 지닌 환상만큼이나 중독적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별다른 고민없이 한강에, 동대문에, 용산에 ‘해외 유명 건축가’라는 새로움 외엔 모든 조건이 같은, 말 그대로 ‘틀에 박힌 그림’을 그려놓고 끝내 망가지는 것을 지켜봤다. 비단 거대 프로젝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틀이 바뀌지 않는 한 학교, 교회, r관공서, 숙박업소 등 도시 곳곳에서 실패는 반복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쿠마 켄고: 약한 건축 books

약한 건축, 쿠마 켄고, 디자인하우스, 2009

일본 건축가 쿠마 켄고Kuma Kengo의 작품을 접한 이라면, 그 입면을 구성하는 패턴의 독특함에 한번 쯤은 시선을 빼앗긴 적 있을 거다. 나같이 무심한 건축학도라면 “일본 건축가답네”라고 한 마디 툭 던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스타일리쉬’한 패턴을 보이는 건축이 오모테산도를 걷다보면 해변의 모래알처럼 차고 넘친다. 켄고상의 <약한 건축>은 이렇게 그냥 훑어보기 십상인 입면 패턴이 지닌 불순한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켄고상에게는 이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생각 외로 깊다.

이 책은 2004년 출간됐다. 당시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15년’쯤을 맞을 때다. 쿠마가 이 책에서 “건축은 세 가지 숙명-크기, 자원 낭비, 긴 수명-때문에 분명 미움을 받아 당연하다”고 주장한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우리도 부동산 경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10여년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건축에 대한 거부감이 보다 확산됐다. (‘건축학개론’은 어디까지나 낭만적 첫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따라서 켄고상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쿠마는 느닷없이 잘 알려진 경제학자 케인스를 소환한다. 미국의 대공황을 건축·토목에 대한 대규모 공공투자로 돌파하고자 했던 그 케인스다. 쿠마는 사실상 “케인스의 정책에는 시간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다”며 “단기적인 처방을 거듭하는 일이 케인스 정책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쿠마는 건축 정책을 활용한 경기 부양을 꿈꾸는 케인스를 비판함으로써 “이 시대 건축에 필요한 것은 접합”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접합’의 필요성은 시간·공간·물질, 어느 것도 예외는 없다. 짓고 부수고 또 짓고, 그렇게 지은 건축은 도도한 랜드마크로 남으며, 이 랜드마크의 물성은 하나 같이 고고한 콘크리트 같은 것. 쿠마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가만 보니, 그의 작품 상당수에서 목재로 조립한 듯한 패턴이 눈에 띈다. 우리가 쉽게 ‘패턴’이라 부른 것들은 켄고상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접합’의 외부적 표현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쿠마는 명확함을 주장했던 모든 유행을 공격한다. 필로티에 상자를 얹은 르 코르뷔지에, 기단에 상자를 얹은 미스 반 데 로에가 줄곧 도마에 오른다. 반면 이들에게 사실상 패배한 데스타일 건축의 복합성에는 아쉬움을 표한다. 거대 공공 건축에서 흔히 나타나는 인클로저(Enclosure, 폐쇄성) 현상은 금융 시스템 내의 파생상품만큼이나 도시에 해가 되는 어떤 것이다. 온갖 왜곡을 일삼으며 결과 외엔 어떤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 건축 사진도 경계 대상이다. 켄고상은 앞서 말했듯 시간·공간·물질을 넘나드는 ‘접합’의 이념으로 중무장했다.

<약한 건축>. 이 책에 ‘약한 건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대목은 없다. 다만 쿠마가 비판하는 대상들을 ‘강한 건축’으로 놓고 보면 그 개념을 미뤄 짐작함이 가능하다. 쿠마의 대표작인 '대나무주택'(Great Bamboo Wall) 등 목재로 이뤄진 작은 패턴 단위를 접합하는 식의 작업을 보면, 그는 확실히 ‘약한 건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켄고상은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리라는 역설을 믿는 듯하다.

박해천: 아파트 게임 books

아파트 게임, 박해천, 휴머니스트, 2013

박해천의 전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해서는 진중권이 모 토론 프로그램에서 간략하게 요약해 전달한 바 있다. “전위적, 혁명적이었던 386세대에게 노태우 정권이 분당 등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아파트 하나씩 던져줬더니 급격히 보수화하더라”는 식의 요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가상의 화자가 풀어가는 서사라는 형식만큼이나 그 안에 담긴 해석도 참신했다. <아파트 게임>에 대한 주목은 그만큼 자연스럽다.

이 책은 부제대로 ‘대한민국 중산층의 웃지 못할 흥망사’를 한 1955년생 베이비부머 세대의 시각에서 한 권의 소설처럼 풀어낸다. 그런 형식의 시도 자체야 새롭단 점에서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만한 사항이 못 된다. 군데군데 인용한 사례들의 출처가 동시대 소설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문제는, 잘라 말해서, 새로울 게 없단 거다. ‘386세대의 보수화’를 ‘아파트 한 채’로 풀어낸 전작에 비해 <아파트 게임>은 신선함을 지니지 못했다. 이미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들어 익숙해진 지적들을 단지 화자 한 명을 끌어와 이야기로써 풀어낸 정도다. 그런 면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후속작 정도로 보면 적당할 듯 하다.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이 책에 담긴 1955년생 베이비부머 세대 주인공의 증언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바로 그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고충과 모순을 간결하게 서술했다는 점일 거다. 이 주인공은 바로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놀랍다. 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아저씨들의 삶과 심리적 배경을 날카롭게 파악해 한 권의 책으로 추려냈다. 당대 재력가들을 풍자한 ‘강남 복부인’들과 달리 늘 부동산 투자에 있어 꼭 한 발씩 늦었던, 또 예상보다 이른 퇴직 후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나 주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의 등장으로 위협받는 주인공의 초상은 누군가와 소름끼치게 닮았다.

이야기는 1955년생 주인공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화를 예고한다. 바로 그 주인공의 카페에서 일하는 저임금 ‘알바’ 노동자, 또 책 말미에 등장하는 학원강사 Y씨가 다음 주인공이다. 앞의 1955년생 주인공이 저임금으로 부려먹는 알바생, 이 구도는 ‘88만원 세대’를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착취하고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를 그려낸다. 학원강사 Y씨는 사교육 시장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 학생의 아버지가 바로 내가 세들어 살고 있는 원룸의 임대인”이라고 가정하며 임대인, 학생, Y씨, 다시 임대인이라는 기묘한 ‘쩐’의 순환 구조를 상상한다. 앞서 말했듯 새로운 시각을 아니지만 분명 섬뜩함은 있다. 이렇게, ‘아파트 게임’은 계속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books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2013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조화’에 대한 이야기다. 이름에 ‘색채’를 뜻하는 한자가 없는 주인공 다자키가, 이름에 색채가 있는 네 친구와의 과거와 현재를 더듬으며 자신과 그들과의 조화를 따져본다. 네 친구, 아카(赤)·아오(靑)·시로(白)·구로(黑)와 달리 이름에 색채가 없음에 남몰래 콤플렉스를 가졌던 쓰쿠루에게 스무살에 닥쳐온 이들의 이별 통보는 꽤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쓰쿠루는 망각을 택했다.

쓰쿠루의 망각은 서른여섯살 때 연인 사라가 나타나면서 끝난다. 사라는 쓰쿠루에게 그 과거가 현재에도 어떤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사라는 쓰쿠루가 얽매여 있는 과거를 풀어야만 함께 미래로 갈 수 있다고 믿는 듯 했다. 쓰쿠루는 과거의 사건들을 찾아 동시간대의 순례를 떠난다.

과거를 찾아간 현재의 순례는 결국 과거와 현재의 간극에 걸쳐 있는 시간의 벽에 부딪친다. 그래도 쓰쿠루는 순례의 마지막 코스, 핀란드의 어느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는 구로를 만나서는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이해했다”며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임을 깨닫고, 또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며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임을 주장한다. 시간이란 벽을 사이에 두고도 연결고리가 전혀 없지는 않은 셈이다. 쓰쿠루는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라고 혼자 되뇌인다.

쓰쿠루의 마지막 독백은 지난 수면 아래 고통과 침묵,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의 희열이 교차하기에 미완성이다. 형이상학적인 조화의 끈을 발견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는 했지만, 현실에서 그 조화의 끈은 보이지 않는 형상의 어떤 것이다. 시간은 계속 미래로 가고, 조화롭지 못했던 과거는 응어리진 채 따라온다. 흑백(黑白)으로 명확했던 구로·시로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회색분자인 하이다(灰) 역시 말없이 떠났다. 쓰쿠루는 여전히 연인 사라와 조화를 이루는 데 미숙하다. 색채가 없는 쓰쿠루는 다른 색들과의 조화를 갈구해야 하는 가여운 운명을 타고 났다. 그래서 우리는 쓰쿠루란 주인공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하루키가 리얼리즘으로 귀환했다”는 출판사의 서평에 공감한다. <노르웨이의 숲>을 떠났던 하루키가 인간 세계로 돌아왔다. <해변의 카프카>를 만나고 <1Q84>를 지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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