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리프킨: 유러피언 드림 books



유러피언 드림(원제: THE EUROPEAN DREAM), 제러미 리프킨 저, 이원기 역, 민음사, 2005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2006년 여름, 나는 어느 운동권 조직에 몸 담은 피 끓는 어린 아이였고, 당시 국내 최대의 이슈는 ‘한미FTA’ 찬반 논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초의 FTA 시도였던 데다가, 상대가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미국이라는 점에서 반대 진영은 반미(反美)계열 조직들의 ‘렬렬한’ 지원을 얻었고, FTA 반대논리를 크게 이슈화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한미FTA 협상 타결 이후 이어진 한-EU FTA 협상에서 그들ㅡ반미계열 조직ㅡ은 별다른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심지어 시도조차 하지 않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전의 한미FTA보다 경제적 파급이 훨씬 클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내가 속해있었던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조직은 일관되게 한-EU FTA에도 반대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반대 논리 중 하나가 ‘왜 무역에서의 경제적인 장벽은 없애려 들면서, 유럽국가들이 가진 좋은 사회보장 및 복지제도는 수입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 논리가 그때의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주장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유러피언 드림The European Dream」은 당시의 나의 그런 개인적인 바람과 맞닿아있는 책이다.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 등 일련의 ‘종말’ 시리즈(번역된 제목에 근거했을 때)로 잘 알려진 리프킨이 이제는 지난 세기를 지배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세계를 채울 꿈을 유럽인들이 만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이 만들어냈고, 만들어내고 있고, 또 만들어갈 ‘새로운 유럽(EU)’이 ‘글로벌’하게 변하는 이 세계의 ‘스탠더드’가 될 것이라는 꿈. 그 ‘스탠더드’를 동경했던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탐독해 볼 가치가 있음을 우선 밝힌다.

「유러피언 드림」에서, 리프킨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숨통을 확실히 틀어막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무엇보다 그 스스로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이 작업은 섬세함에 신랄함을 더한다. 이 장에 따르면 지금의 미국인들은 더 이상 예전 같지않다. 그들은 과도한 신앙심에 이성이 마비됐고, 과거 조상들이 지녔던 근면과 인내의 근로윤리를 저버린 채 ‘대박’의 요행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되었으며, 점점 더 개인화되면서 이웃과의 공공의식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미국이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제일 잘 나가는 국가라는 것 역시 오해다. 생산성도 낮고, 일자리도 없고, 근무환경도 좋지 않다. 교육도, 의료도, 빈곤구제도, 심지어 살인 같은 범죄나 교도행정에 있어서도 미국은 문제투성이일 뿐이다. 희망이 없다. 아메리칸 드림은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을 짚어보기 위해 리프킨은 미국의 조상 뻘인 유럽의 과거와 현재를 여행시킨다. 이 여행을 통해, 작금의 절망적인 미국을 만든 원인은 유럽에서 발생했지만, 유럽은 이미 그것을 버리거나 극복한 채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유럽이 걷고 있는 다른 길, 즉 유러피언 드림은 황폐해진 아메리칸 드림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유러피언 드림이 대체 무엇이기에?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에 대한 주목은 <EU>체제의 건설로부터 시작된다. 국경선으로 나눠진 복수국가들의 연합(혹은 연방)체인 <EU>는 세계화된 경제체제에 적응하기 위한 변신이다. 근대 민족국가 체제는 이 새로운 경쟁의 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네트워크화된 세계에 <EU>는 그 자체로써 대응하는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는 협력적이며, 과정 지향적이고, 다양성을 확보한다. 일방주의적이고 국수적인 현재의 미국과는 확실히 다르다. 따라서 가까운 미래에 미국은 쇠퇴하고 유럽은 흥할 것이다. 이것이 리프킨의 미래 예측이다.

유러피언 드림은 경제적 양식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평화와 인권, 그리고 환경문제에 관한 철학에서도 유럽은 미국과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네트워크화된 유럽을 바탕으로 보다 덜 경쟁적이고 덜 시장적인 체제를 구축해가는 것은 곧 평화 유지와 보편적 인권의 보장, 그리고 생태적 환경복원의 단초가 된다. 리프킨이 보기에 유러피언 드림은 아메리칸 드림보다 더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에 더 적합하다.

리프킨이 제시하는 ‘유럽의 꿈’은 분명히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계몽주의로 무장한 합리적 인간이 지칠 줄 모르고 물질적 풍요와 진보를 향해 달린 부작용이 이제 지구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고, 그 선두에 섰던 미국은 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외면하거나, 심지어는 반대로 나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다만, 유러피언 드림이 실제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실현 가능한 것인지가 문제다. 무엇보다 리프킨이 말하는 ‘유러피언 드림’이 민족국가를 초월한 연합체로서의 유럽을 가정하고 정의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유럽이 정말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두 차례나 세계 대전의 무대였던 그 유럽이?

이러한 의문은 리프킨도 책 전반에 걸쳐 공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보편적 인권’ 개념을 하나의 유럽을 가능케 할 매개체로 내세운다. 핵심은 단순히 이타적이고 온정적인 개념으로서의 인권이 아닌, 다가온 전 세계적인 위협과 리스크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인류의 미래를 지속시키기 위한 필요성에서 보편적 인권의 개념이 비롯된다는 점이다. 리프킨은 이를 ‘공감(共感)의 정치’라고 부른다.

아쉽게도, 이 지점이 이 책의 눈에 띄는 약점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공감의 정치’ 개념이 역사 발전의 맥락에 비춰볼 때, 다소 비약적이고 감성적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리프킨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중략) 소유적 의무가 중세의 신앙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했고, 재산권이 물질적 진보의 시대에 실용주의를 구축했으며, 다가오는 새 시대에는 인권이 세계화 의식을 고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기준이 되고 있다. (349p, 강조는 필자의 것)

자본주의가 이전의 역사와는 완전히 단절을 꾀했다지만, 여전히 중세와 근대를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는 ‘소유’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이었다. 다만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따라 권리와 의무, 그리고 계급이 달라지는 것이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갑자기 ‘보편적 인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믿음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조금 의아하다. 인권에 대한 관심이 현대에, 그리고 특히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연 소유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을 대체할 만큼, 혹은 그것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소유를 둘러싼 권리 여부는 인간의 이기심을 끌어내고 자극했지만, ‘보편적 인권’은 그만큼의 지속적인 자극을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공감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네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따름으로써 가능하다.(361p)

이처럼 마치 성경 문구 같은 글을 제시하며, 그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시스템적 윤리관’이 과연 얼마나 지속가능한 것일지 의문스럽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테두리 내에서는 말이다. 아직은 유러피언 드림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아쉽지만, 사실이다. 리프킨이 정리하고 우리에게 제시하는 유러피언 드림은 아직은 정말 ‘꿈’일 뿐이다. 현재 유럽 역시 불황의 늪에 빠져있고, 이에 뒤따르는 각종 사회적 갈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듯 하다. 심지어 절망적인 파시즘이 다시 준동할 기미까지 엿보인다. 하지만 또 다른 사실은 전 지구적 불황, 민족적 갈등, 국가간 전쟁, 환경 파괴 등 총체적 위기를 목도하는 우리에게는 리프킨이 유러피언 드림이라고 명명한 꿈이 필요하다는 것일게다. 아직은 그것의 실제적 재현을 낙관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비관에는 언제나 그만큼의 열망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그런 열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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