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books

위건 부두로 가는 길(원제: The Road to Wigan Pier), 조지 오웰 저, 이한중 역, 한겨레출판, 2010


책의 앞머리에 실려있는 박노자의 ‘추천의 글’은 작가로서의 조지 오웰의 가치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요컨대, ‘비판적 개인’의 대명사인 오웰이 평생에 걸쳐 그 스스로 ‘사회주의자’를 자임했던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비판적 개인’의 독립성 사이에 그 어떤 적대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의 오웰은 확실히 그렇다.

책을 읽기 전에 염두에 둘 것이 있다. 이 책ㅡ특히 2장ㅡ을 감싸고 있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1930년대 중반의 유럽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당시의 유럽은 경제적으로 대공황상태였으며, 독일의 나치를 비롯한 절망적인 파시즘이 세를 뻗치던 시기였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절박함 탓에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오웰의 문체는 시대적 산물임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이마저도 당대의 여느 지식인들에 비해서는 여유롭고 세련된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자.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현재는 이 책이 쓰여진 1936년의 유럽 상황에 견주기 부족함이 없다. 만성적인 경제 공황, 민주주의의 급격한 후퇴, 첨예해진 국가 간 갈등과 전쟁위기, 그리고 진보주의적 대안의 부재. 이런 상황을 두고 한국에서도 파시즘의 성장을 위한 토양이 비옥해지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크게 두 장으로 나뉜다. 첫째 장은 1930년대 영국의 북부 탄광지대에 대한 오웰의 보고서다. 여기서 등장하는 ‘막장’(석탄광산의 제일 끝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인생’ 혹은 ‘드라마’의 수식어가 되면서 비하적이고 더러는 희화화되기도 했지만, 오웰이 직접 탄광을 드나들고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기록하고 묘사한 실제 막장, 그리고 막장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노동은 비참함과 고됨을 넘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우리의 윤택하고 풍요로운 삶은, 항상 어딘가에는 ‘막장’이 있어야 함을, 심지어 그럼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둘째 장은 제목 그대로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에 대한 글이다. 오웰은 글머리에서부터 줄곧 ‘계급’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러면서 민주적 사회주의의 '적'을 단순히 부르주아 혹은 파시즘 등 외부의 것이 아닌,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무리의 내부에서 찾는다. 오웰이 주로 겨냥하는 대상은 상당수의 ‘중산층 계급 사회주의자들’이다. (오늘날에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 중 많은 수가 중산층 출신임을 감안하면 보편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주제다.) 오웰은 스스로 중산층 출신으로서 자신이 지닌 배경과 심리를 솔직히 밝히며, 한편으로는 계급의 상승을 꿈꾸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감상적 환상을 가지기 마련인 이들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의 세속적 심리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성은 사회주의 내부에서의 혼란을 가중시키며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여, 광범위한 대중을 사회주의 진영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 오웰의 지적이다.

사회주의자가 사회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오웰의 지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특히 중산층 출신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 역사에서 내내 반복되어왔다. 다만 오웰의 지적이 다소 특별한 것은, 그의 비판이 거시정치적 맥락에서부터 소소한 행동∙생활습관 따위에도 걸쳐있다는 점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후자의 맥락을 거시정치 담론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어, 억양, 발음, 옷차림, 식사예절 등등에서 엿보이는 소위 ‘먹물’ 혹은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적 속물근성. 오웰이 보기에 이러한 것들이 현실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이데올로기 자체를 넘어선다. 평범한 노동자에게 사회주의란, ‘더 많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 시간과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p. 263)는 시각에서 보면 확실히 그렇다. 대중과 노동자의 요구는 매우 간단한데 비해 사회주의자 혹은 지식인들의 설명은 너무 장황하고 어려우며, 실제로 그들이 평범한 노동자의 삶에 얼마만큼 공감하고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입에서는 온갖 사회주의적 레토릭을 남발하는데 익숙하지만, 실제 생활은 당대의 노동자들과 엄청난 괴리가 있으며, 심지어 그 괴리를 좁혀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웰의 주장이다.

마땅히 사회주의(혹은 좌파적 진보주의)를 지지하리라 여겨지는 부류의 대중을 포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작금의 한국 진보정치도 마찬가지로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진보정치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오웰이 당대 사회주의 진영에 가하는 날 선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들어맞아서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p. 212)는 문장이 뜨끔하게 여겨질 정도다. 진보를 말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여전히 어려우며, 그들만의 빈곤한 인터넷 페이지에서 겨우 떠들어대고 있는 정도다. 급진적 주제를 활자의 나열로써 붕 뜨게 만들어서는 대중에게 절대로 다가서지 못하며, 평생 ‘2중대’ 노릇만 하고 사는 운명을 맞고 말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1중대’는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파시즘에 대항할만한 주제도, 능력도, 용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이 내세우는 부족한 ‘소통’에 대한 비판은 이제 스스로를 향할 때가 아닐까? 그들에게 '사회주의' 혹은 '진보'라는 구호가 부르주아 권력의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한, 다시 말해 단순히 권력쟁취 의제의 '블루오션'인 것 아니냐는 의심가득한 대중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갈수록 힘을 잃어가는 진보정치 세력과, 되려 과거 독재자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이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로 지목되고 있는 절망적 현실을 목도하는 우리에게, 근 한 세기 전의 오웰의 비판이 여전히 유효하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화이트)

00
16
49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