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books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 저, 북드라망, 2012

보통 사용설명서는 아주 원초적인 실용서다. 명확한 조작방법과 이에 대응하는 명확한 기능. 허나 단순히 제목에 ‘사용설명서’가 들어있다 해서 ‘나의 운명’도 그렇게 대응하게 만들어주리라 기대하면 곤란하다. 그런 기대는 우리가 사주명리학, 즉 흔히 일컫는 ‘팔자’를 논할 때 역시 흔하디 흔하게 갖는 편견인 ‘숙명론’에 다름 아니다. 저자의 귀띔은 오로지 조작방법까지만. 조작의 결과는? 글쎄, 모른다거나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답 정도가 최선일 게다. 그럼 대체 왜 사용설명이 굳이 필요한가. 그건 조작방법,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바로 그거다. 사용설명의 목적은 오롯이 현재를 사는 것에 있다. 사주명리학에서 말하는 운명의 체계를 앎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음양오행이라는 매트릭스”는 결코 꽉 막힌 세계가 아니다. 거기에는 “안팎이 없다. 내가 곧 우주고 자연이 곧 나의 연장이다.” 나의 운명을 우주적 관계에 놓고 사유하는 체계가 바로 사주명리학이다. 동양적 사유의 전형, ‘관계’의 사유다. 핵심은 관계다. 관계를 조작함에 따라 우리 운명이 운동을 시작한다. 부모-자식관계, 친구관계, 연인관계, 직장동료관계, 그리고 시대 및 사회와의 관계. 어쨌든 관계, 관계, 관계.

저자는 인류의 모든 팔자가 ‘원초적 평등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생년월일시를 각각 천간(天干)과 지지(祇支)로 나타낸 여덟 개의 문자, 즉 팔(八)자. 거기엔 제 아무리 스티브 잡스일지라도 예외는 없는 법. 그러고 보면 그 많은 부와 그 높은 명예도 췌장암이란 죽음의 그늘 아래선 무력하지 않았나. 그게 팔자다. 누구나 가진 태과(太過)와 불급(不及)의 팔자. 우리 운명은 이 태과와 불급의 순환을 추구할 때 온전한 자기 삶이 된다. 왜냐하면 이 태과와 불급이란 것이 태생적인 특성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표상(表象) 역시 특정한 태과와 불급을 강요하는 탓이다.

어렵지 않다. 물직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나타내는 매우 적절한 말 아니던가. 이것이 바로 사회적 표상으로서의 태과와 불급이다. 가정, 교육, 취업 등의 일상적 활동이 모두 물질적 풍요에 제일 목적을 두게끔 부추기는 사회. 반면 누구도 정신적인 만족감을 갖지 못 하는 사회. 우울증, 공황장애, 높은 자살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사회의 슬픈 자화상.

저자는 이 지독한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주범으로 ‘핵가족’ 제도를 지목한다. 물론 핵가족 자체가 자본주의의 도입과 함께 발달했으니 그 안에 자본주의 작동 기제가 상당히 담겨있는 것은 사실일 터. 자상한 아버지, 다정한 어머니, 그리고 그 자식으로 구성된 삼각의 ‘홈, 스위트 홈’에 대한 망상. 이전 사회가 갖고 있던 공동체적 관계망을 제거하고 축소함으로써 국가와 자본은 모든 ‘팔자’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모든 관심과 욕망의 관계망은 이제 오로지 자본만을 향하고, 우리는 그것을 탐욕이라 일컫는다. 굳이 사주명리학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그 논리 자체는 매우 설득력 있다.

책을 훑다 보니 어느새 노트에 나의 팔자를 적어놓고 운명의 지도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저자의 조언대로 이 관계의 사유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갈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그나저나 ‘을경합금(乙庚合金)’이라는데, 의리파 쾌남 ‘경금(庚金)’형인 내가 기다리는 하늘하늘 코스모스 같은 ‘을목(乙木)’녀는 어디에 계시려나.

덧글

  • 2013/03/07 11:22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NSHEO 2013/03/07 18:50 #

    고맙습니다^^
    간혹 들러주신다니 더 고맙네요!
    을목녀라니... 반갑네요 ㅋㅋㅋㅋ
    또 뵙겠습니다~
  • 을목녀 2013/03/12 16:00 # 삭제 답글


    후기읽고책을 방금다읽었습니다~사주명리학이중심인책은,아니었고,
    인문학과연계되어이해하기에많은도움이되었으나
    또적당히이해하고나니,나열되지않은것들에대한갈증도생기네요~이
    분의,다른책은안읽어보았지만실제예시나,내용정리가너무적은것은,
    아쉽습니다.
    덕분에좋은책읽어서감사인사합니다
  • NSHEO 2013/03/12 17:12 #

    네 확실히 좀 그런면이 있죠. 사주명리학이 궁금한 사람은 또 따로 예시를 찾아보거나 공부를 해야할 것으로 보여요. 어찌보면 사주명리학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책의 주제나 구성 양면에 다 들어맞는 컨셉인 것 같기도 하구요.

    저도 덧글에 감사인사를...(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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